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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 입주작가
 

  이름
이소진
  장르
설치
  이메일
utmarine@naver.com
  홈페이지
http://www.gn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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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2007 대구가톨릭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2012 대구가톨릭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학과 졸업

SOLO EXHIBITION
2016 “Moving Territory_P.1“, 杭州柘木汇艺术空间Zhe mu hui artspace, 중국
2015 “표면 아래“,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영천
2014 “시원적 만남”, 범어아트스트리트Curve2410, 대구
2013 Glass Box Artstar Ver.7 “어느... 파쿤의 성星”, 봉산문화회관, 대구
      WindowGalleryProject4“인생의 묘미”, 예술공간Atory, 대구
2012 Gallery jung 개관기념전"요상한 레프리콘", 갤러리jung, 부천
2011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릴레이 개인전 "이소진展", 스페이스 가창, 대구

GROUP EXHIBITION
2016 해외레지던시프로그램 결과전 "육출기계-기묘한 꾀", 스페이스 가창, 대구
2015 시력프로젝트기획"시력 검사", 봉산문화회관, 대구
     "꿈꾸는 보따리", 기당미술관, 제주도
     Ten-Topic Artist Festa 2015,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제1회 창작경연 작가대전,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2nd Studio", 시안미술관, 영천
     Artspace Purl "0% 4", 아트스페이스펄, 대구
     2015 GAP(Glassbox Artist Project) "Actually I", 봉산문화회관, 대구 
     Bode Young Artist Project, Bode gallery, 대구
2014 썬데이페이퍼 "Return to Bangchun-Table&Chair", Toma갤러리, 대구
      "Comas Artfair", 목포문화예술회관, 목포   _외 다수

RESIDENCY
2016 해외레지던시프로그램 중국미술학원국가대학과학기술원_항주 
2015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2010-2011 가창창작스튜디오 8기

작품소장 한국감정원



순간의보존이영원을간직한다   김미형

작가와 작품을 알아가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그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매력을 느끼는 순간 역시, 신기할 따름이다. 이소진이 대구미술관 프로젝트 룸에서 꼭 실현하고 싶은 작업 아이디어가 있다고 당찬 포부와 열망을 드러낼 때,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한 번은 작가를 조수석에 태우고 목적지까지 가는 길안내를 부탁하니, 몸으로 기억한 길은 직접 핸들을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 머리에서 경로가 보인다고 했다. 그러더니 진짜 운전석에 앉은 것처럼 가상의 핸들을 움직이면서 길안내를 해주었다. 그때 이소진이 가드너가 말한 시각-공간 지능 뿐 아니라, 신체-운동 지능(Bodily-kinetic intelligence)이 발달한 사람이란 걸 눈치 챘다. 신체활동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쉽게 받아들이면서 머릿속 생각들을 시각화할 때 몸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평면과 입체 설치작업에 등장하는 비정형의 유동성이 강한 형태들은 관습적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도 저런 능력들을 가동시키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여 만들었나 보다. 지금까지의 작업들이 훈련된 미술교육의 자동적인 결과물만은 아닌 것 같다.  
  <발밑, 뤼쾨이에>를 기점으로 이소진의 작업들은 평면을 뛰쳐나온다. 시리즈와 <레프리콘>시리즈로 전개되던 평면작업의 이미지들은 원형질의 생명체들이 우연과 즉흥으로 연결되고 교배되어 탄생한 괴수들로 보인다. 설치작업에서도 평면의 조형원리를 일관되게 반복하지만 재료들의 혼합, 아이디어와 재료와의 결합, 공간과 오브제와의 관계로 시각적 상상력이 다면적으로 확장된다. 섬세하게 묘사되어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 같았던 춤추는 선의 윤곽들은 털실과 인조 모피가 주는 예민한 촉감으로 되살아나고, 부유하던 촉수들은 우산살과 투망으로 공중에 매달리거나 지상에 안착하고, 벽을 의지하던 비정형의 합판은 액세서리 거치대와 마네킹, 대나무와 알루미늄 기둥으로 설치물을 지탱하는 뼈대로 변이되었다. 
  이소진은 순간의 허무를 영원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는 시간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반복되고 재생되는 시간의 축적을 상징하는 죽음의 신과 죽음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생명들이 공존하는 형태로 묘비예술을 시각화했다. 시간과 기억의 죽음과 부활은 육체의 죽음과 다르기 때문에 반복되고 재생된다. 그래서 이소진은 순간을 보존하면 영원을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에서는 벌레집을 모티브로 하여 생명이 탄생하고 확산되는 순간의 응집된 에너지를 보여준다. <어느... 파쿤의 星>은 유리 벽면을 사이에 두고 밖은 현실의 시간과 힘이 작용하는 세계를, 상자 안은 소중한 순간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탄생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이 원하는 시간으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작업을 통해 순간과 영원의 세계를 매개하려면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야만 둘 사이의 준엄한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소진의 상상력은 일상에서 발견된 기물의 형태와 쓰임새를 변형시켜 공간 속에 자유롭게 연출하기를 즐긴다. 또한 작업의 표면과 의미상의 고리를 흩트려 놓음으로써 관람자가 지각을 통해 그 의미를 추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작품이라고 난감해 하지 마시고 어린 아이처럼 작품이 내뿜는 에너지를 즐기시기를.


영프로전시평론   정명주

이소진 은 자신의 기억 저편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평면작업에서 보여주었던 작품은 부유하는 생명의 원형질을 색채로 감싸놓은 듯한 표현기법에 섬세한 여성적 감성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후 이소진의 작업은 마치 알을 깨고 나온 꿈틀거리는 그 어떤 생명처럼, 공간을 향해 자유로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평면적인 사각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형상으로 변모하는 그녀의 작업은 새로운 생명의 숨결로 오감을 동원해야만 감상이 가능한 설치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런 감성적 욕구가 분출되는 방식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동화적 모티브에서 차용한 작품 – 「정령 레프리콘 시리즈」, 「뤼쾨이에(Ole LukØje) 이야기」, 「어느… 파쿤의 성」 - 을 통해 선악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상상의 문을 열수 있는 꼬투리를 제공한다. 작가의 오감을 통해 선택된 강렬한 색상과 다양한 오브제의 결합은 새로운 생명이 되어 달콤한 상상력이라는 주술을 걸어 놓는다. 이 작가는 "죽음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새로 시작되는 것이다. 내 작품은 순간의 보존 혹은 기념물과 같다. 행복했던 순간의 감성을 가둬두고 싶은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솜, 천, 실, 오브제들이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결합하고 연결되는 과정인 기억의 저편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 오는 시간 여행을 지나면 하나의 부유하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이것은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을 찾아가는 시간 여행이고 잠재된 상상력의 문을 열고 들어 가는 작업을 통한 의식행위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식행위가 "무엇이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 보다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 감정, 직감 등을 통해 타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작가의 말처럼, 감성을 일깨우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그녀의 작품 앞에서 자신만의 기억의 세계로 들어가는 주술에 걸리게 될 것 같다. 



건설 중인 상징적 우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에서 릴레이 개인전으로 열리는 이소진의 ‘표면 아래’전은 기존의 작업스타일을 바꾸면서 자신의 ‘표면 아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늘 표면만 보지만 작가는 그 이상을 보려한다. 이소진에게 예술을 그러한 자기 탐색의 장이다. 예술을 통한 자기탐색은 협소한 자기중심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몰입의 강도가 높은 예술은 자기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이 도달하는 곳은 자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술은 자기 바깥으로 나아가게 한다. 바깥에 있어야 안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자기 안에만 있으면 자기조차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각목이나 종이, 실 등으로 이루어진 이소진의 설치물에서 표면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견고하지 않은 재료들이 끊어질 듯 헐겁게 연결된 작품의 구조에서 심층은 감춰지지 않는다. 심층은 부재하거나 또 다른 차원에 은폐되어 있다. 이소진의 작품에서 심층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표면을 탐사해야 한다. 
심층은 핵심이나 본질이 아니라, 표면과 연동되는 이면이기 때문이다. 설치작품은 천정으로부터 내려와 공중에 붕 떠 있는 5개의 ‘문’과 4개의 ‘기둥’이 기본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전시장은 일종의 무대가 된다. 무대에서는 각각의 형태보다는 관계가 중요하다. 관계는 맥락과 분위기를 만든다. 형태는 자기만의 자족성으로 그곳에 서있음에 비해, 맥락과 분위기는 누가 왜 그곳에 있는지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대로서의 예술은 형태로서의 예술 작품과 달리,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이다, 무대는 그 안에 들어간 이에게 지각과 기억을 촉구한다. 지각이 바탕 하는 공간과 기억이 바탕 하는 시간도 활성화된다. 문과 기둥으로 암시된 선적 구조물 사이에 걸쳐서 면의 역할을 수행하는 하얀 종이들은 잘게 잘려있어서 마치 성황당 같은 주술적 분위기가 있다. 대개 성황당은 화려한 색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이소진의 경우에는 색이 빠졌다. 
그것은 색색의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이전 작품의 스타일과 결별하는 일종의 굿과도 같은 행위의 무대다. 화려함 뿐 아니라 완성감도 덜어냈다. 설치물이 있는 전시장은 건설 중인 공사장 같은 느낌도 있다. 대개 무너지는 것과 건설되는 것은 차이가 없지만, 삶의 흔적이 없는 새하얀 종이나 실, 깨끗한 각목들은 그것이 건설 중인 상징적 우주임을 말한다. 30대 초반은 대개 자신만의 상징적 우주의 얼개를 짜는 시기다. 문도 그렇고 기둥도 그렇고 각목으로 얼기설기 엮인 구조는 취약해 보인다. 각목으로 만든 문 5개 중 하나만 전형적인 문의 형태를 연상시키고 나머지들은 문의 흉내만 냈다. 옛날 텔레비전 안테나같이 생긴 것도 있고, 마굿간 입구에 대략 걸쳐졌을 법한 문도 있다. 그 문에서 하얀 명주실과 종이로 된 끈나풀들이 여러 형태로 내려온다. 옛날 창호지 문을 생각한다면 종이는 나뭇살에 붙어있지 않고 둥 떠 있는 형국이다. 
문들은 열려있으나 닫혀있으나 별반 차이가 없는데, 자리를 못 잡은 종이들은 그러한 불완전성을 더욱 강조한다. 안과 밖을 수시로 바꾸는 얇은 종이들은 가변성을 강조한다. 기둥들 역시 내부는 텅 비어있어서 바닥과 천정을 사이를 받쳐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그것들은 아래와 위를 연결해주는 역할은 한다. 지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과 마주하는 수직적 구조는 늘 상 그러한 연결의 역할을 해왔다. 가령 살아있는 나무나 솟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소진이 쓰고 있는 각목은 나무이긴 하지만, 자연이나 전통의 느낌은 휘발되어 있다. 각목은 인공적이면서도 날것의 느낌을 주는 재료로, 현대 미술가들에게 애용되는 재료이기도 하다. 종이나 끈같은 부드러운 재료도 각목의 거친 표면과 날선 각을 완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각목은 이소진의 작품에서 가설무대 같은 느낌을 준다. 문에 대한 영감은 제주도에서 왔다. 그것은 훼손되어 폐쇄된 올레 길을 막아 놓은 문이었는데, 허허벌판에 서있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그 문이 작가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문은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면서도 구분한다. 그래서 문은 상징적인 경계의 역할을 해왔다. 이소진의 작품에서의 취약한 구조물로 된 문은 구분보다는 연결을 강조한다. 그것도 여러 개의 문들을 세워놓음으로서 문들을 계속 통과한다는 암시적 설정이다. 여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저기도 불확실하다. 그것은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한 끝없는 유랑으로서의 삶과 예술에 대한 비유이다. 기둥도 지상에 닿아있지 않다. 작가는 텅 빈 기둥 내부를 굳이 감추지 않는다. 둥 뜬 기둥들은 불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느 하늘 아래든지 자신의 거처를 삼을 수 있게 할 것이다. 문 위쪽에서 아사 천으로 머리 땋듯이 내려오는 구조물은 제주도의 토속적인 자연 정수기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원래 형태는 나무에 짚으로 머리 땋듯이 내려오는 구조이며, 아래에 항아리가 있어서 이슬과 빗물을 모으는 장치이다. 섬이라서 물이 귀해 만들어진 생활의 지혜가 발휘된 발명품이었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는 힘겨운 과업임을 생각해 볼 때, 아침햇살에 곧 사라질 이슬방울마저도 모아야 했던 전래의 삶이 머나먼 현실 같지는 않았으리라. 취약한 형태의 문과 기둥은 여기와 저기를 나누는 경계보다는 사이를 통과하는 통로임을 강조한다. 불확실한 통로라는 비유는 고정된 형태를 극복하려는 현대조각의 화두이기도 했다. 바람 불면 날릴 것 같은 종이나 슬쩍 당겨도 떨어질 것 같은 실들도 구조보다는 구조가 만들어내는 잠재적인 통로를 강조하는데 일조한다. 종이나 실은 미로를 통과하는 자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과 관련될 수도 있는 그것들은 엉켜있다. 제각각의 형태의 문들과 제각각의 높이의 기둥 사이의 관계는 건축적 합리성을 결여한다. 작가가 연출한 무대는 뻥 뚫려있으면서도 미로 같은 공간인 것이다. 문이나 기둥 같은 건축적 구조는 작가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통과의례의 통로가 되고 있다. 
전시란 통과의례처럼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계기이다. 전시는 대개 오픈 일자를 맞춰서 총력전 형식으로 진행되곤 하지만, 그 성과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전시회는 작가로서는 자신의 장점만큼이나 취약함이 드러나는 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핍감이 그다음 작업을 추동하고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력이 되곤 한다. 주기적으로 맞는 도전의 장을 통해 작가는 성장, 아니 최소한 변화를 인지한다. 일상의 재료를 연금술적으로 변형시켜왔던 이소진에게 전시란 변모의 무대이다. 각목 몇 개를 이어서 만든 문과 기둥은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변모되었고, 전시장이라는 중성적 공간에서 차원의 변주를 꾀한다. 그러나 변모한다는 것만 확실할 뿐,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 변모할 것인지는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다.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야기하는 그러한 불확실성은 예술을 무익함과 낭비, 심지어는 광기와도 연결시킨다.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은 몰입을 낳는다. 몰입은 위험에 가득한 우주 속에서 경계태세를 유지할 수 없게 하지만, 동시에 몰입하는 자에게 자유의 느낌을 준다. 거기에서 모든 규칙을 자기가 정하고 카타르시스를 주는 일탈 또한 마찬가지다, 일상과 무의식이 촘촘히 결정되어 있는 시스템 사회에서 몰입은 탈출구가 되어준다. 탈출구가 되어주는 것은 예술적 속성이 있다. 그래서 예술은 놀이, 도박, 사랑 등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전시장에 늘어서 있는 핵심 없는 구조들은 변형중의 사물을 은유한다. 꽉차있고 질서정연한 상태에서 변형이란 재난일 것이다. 그러한 비유를 촘촘히 서있는 형태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도미노 게임 같은 것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그러한 위험을 어느 때보다도 높인다. 그러나 간극과 틈이 많은 무대에서 생성되는 사건은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다. 
물리적 사건사고는 몸과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지만, 예술적 사건은 그럴 위험이 없다. 예술적 사건은 오히려 몸과 마음을 갱신한다. 아늑한 상징적 우주에서 벌어지는 상상력의 향연은 위험 없는 변화를 야기하며, 그것이 예술에 몰입하는 이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선물을 끝없이 주고받는 것 외에 아무 목적이 없다. 그것은 축제와 같은 상징적 교환이다. 물론 예술이라는 선물은 도구화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도구란 이미 기능과 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미지의 것이다. 작가는 장을 만들어 놓고 사건이 일어나길 기다린다. 사건을 만드는 것은 자리이다. 잘게 잘려지거나 꼬여서 무한한 주름을 만들어내는 종이와 실 같은 재료들은 사건의 결과 겹을 확장시킨다. 빈틈없는 상징적 우주를 건설, 또는 재현하려는 주체를 대신하는 사건은 젊은 작가에게 성장 판이나 부름켜의 역할을 할 것이다.